지난 1월 ‘1단계 무역합의’ 서명 이후 잠잠했던 미중 갈등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 상무부가 민간용 첨단 제품에 대한 새로운 수출 통제 강화 대책을 마련하면서 당초 코로나19 책임론에서 시작된 논란은 무역 이슈로까지 번지는 양상이다. 코로나19 방역 실패에 대한 미국 내 비판 여론을 피하면서 코로나19 종식 수순을 밟는 중국을 견제하는 등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의도가 역력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27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중국에 대한 새로운 수출규제안을 도입했다. 미 상무부는 이날 미 기업이 민간용 물품을 중국에 수출할 때도 군용 판매 허가를 받도록 하고 외국 회사들이 특정 미국 상품을 중국으로 운송할 때 미 정부 승인을 받도록 하는 내용의 규정안을 발표했다. 윌버 로스 상무장관은 “미국 기업들로부터 구매한 물품을 군사용으로 전용한 이력이 있는 국가들과 거래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로이터는 “규정 강화가 반도체 산업과 통신장비·항공장비 등의 중국 판매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 전했다.
이번 규정은 중국이 국내 치안 및 해양 방어 등을 담당하는 준군사 조직인 무장경찰과 그 산하인 해양경비대의 강화 방안을 추진하는 가운데 나왔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150만 규모 무장경찰의 무력과 역할을 강화하는 관련법이 26일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제출됐다. 외신들은 이번 개정이 중국 정부의 국내 통제를 강화하고 남중국해 세력 확장을 위한 차원이라고 해석했다.
올 1월 1단계 무역합의 서명으로 한숨을 돌렸던 미중 갈등은 이번 조치로 더욱 확대될 수 있다. 그동안 중국은 민간용 첨단 제품을 들여와 군사적 용도로 활용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게 트럼프 행정부의 생각이다. 로스 상무장관이 이날 “미국의 첨단 기술이 잘못된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경계하겠다”고 지적한 것도 이 같은 시각의 연장선으로 풀이된다. 이번 조치를 계기로 미국의 대중 압박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안보 당국은 중국이 민간기업과 군대 간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국방력과 관련 국방 산업을 강화시켜온 것에 대해 우려를 보여왔다”면서 “새 규정으로 반도체, 항공 관련 제품에 대한 중국 등 대외 수출 통제력이 한층 강화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번 조치는 중국뿐만 아니라 러시아·베네수엘라에도 적용되지만 중국이 1차 목표가 될 것이라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미국의 대중 공세가 자국 내 코로나19 방역 실패에 따른 트럼프 행정부의 희생양 찾기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11월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지지자들을 결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중국 때리기에 나섰다”며 “그의 잘못된 정책에 또 하나를 추가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현지 관련 업계에서도 반도체 분야를 중심으로 비판적인 시각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조치로 반도체·센서 등을 중국으로 수출하는 미국 기업들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산업협회(SIA)의 한 관계자는 “반도체 수출 통제가 과도하게 확대될 수 있다”며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도 더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가뜩이나 미국의 코로나19 중국 책임론에 대해 반감이 큰 시진핑 지도부는 강력하게 반발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 내에서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미국의 대중국 압박이 무역전쟁과 마찬가지로 패권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시진핑 리더십을 지키고 중국의 대외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기 위해서는 무역 전쟁과 마찬가지로 코로나19 이슈를 둘러싼 논란에서 쉽게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국 지도부의 생각이다. 베이징의 한 외교소식통은 “코로나19 사태로 중국의 1단계 무역합의 이행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2단계 협상 시작은커녕 지난해 말 수준의 갈등관계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전했다. /베이징=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