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확인 절차 없이 익명으로 대화가 가능한 ‘랜덤채팅’ 공간에서 청소년 대상 성범죄가 끊이지 않자 정부가 오는 12월부터 랜덤채팅 애플리케이션을 청소년 유해매체물로 지정하기로 했다. 본인인증이나 대화 저장, 신고 기능이 없는 랜덤채팅 앱은 청소년 이용을 전면 차단하겠다는 방침이다. 또 국회에서는 온라인상에서 행해지는 ‘그루밍’에 대한 처벌 법안 등도 잇따라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청소년이 랜덤채팅 앱에 접근할 수 있는 우회로가 여전히 존재해 정부 대책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면밀한 모니터링과 처벌 강화뿐 아니라 사회적 인식 변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범죄소굴 된 랜덤채팅 앱…'18세 여성'으로 가입해봤더니]
여성가족부는 지난 5월 실명인증, 대화 저장, 신고 기능이 없는 랜덤채팅 앱을 청소년 유해매체물로 지정하겠다고 밝혔다. 랜덤채팅 앱이 청소년 조건만남과 성매매 알선 등 성범죄의 통로로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커진 데 따른 조치다. 유해매체물로 지정될 경우 사업자는 이를 고시하고, 청소년을 상대로 앱을 판매·유통하는 행위가 금지된다. 해당 대책은 이달 10일 전후로 고시돼 3개월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12월부터 본격 시행될 예정이다.
청소년의 랜덤채팅 앱 접근을 막기 위한 정부 대책이 나왔지만 온라인 공간에서 발생하는 성착취를 근본적으로 막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명인증을 하지 않아 유해매체물로 지정된 앱이 앱스토어가 아닌 다른 경로로 유통될 경우 범죄가 발생하더라도 사실상 가해자 추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여가부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앱이 다른 경로로 유통됐는지 모니터링하면서 해당 사이트에 삭제 요청을 하는 수밖에 없다”며 “추후 문제가 발생하면 보완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청소년을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적 가해를 하는 ‘온라인 그루밍’ 범죄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온라인 공간의 익명성과 폐쇄성을 무기로 경제적·정서적으로 취약한 청소년을 유인해 벌어지는 성착취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소리를 반영해 21대 국회 들어 권인숙·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온라인 그루밍 처벌 법안을 잇따라 발의했다.
한발 더 나아가 증거 수집을 위해 경찰의 잠입수사를 허용하는 법안도 함께 발의됐다. 앞서 2013년에도 아동·청소년 성매매에 대한 잠입수사 도입이 추진됐으나 결국 불발된 바 있다. 관련 법안을 발의한 진 의원은 “성착취 범죄는 가입자 확인과 IP 추적이 어려운 다크웹 등을 통해 비밀리에 이뤄져 증거 확보와 범인 체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디지털성범죄를 조기에 발견하고 예방하기 위해서는 위장수사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잠입수사 허용의 경우 부처 간 추가 논의가 필요한 사안임에도 아직 관련 협의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진 의원실 관계자는 “실무적 논의가 진척되지 못한다면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위헌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경찰청은 29일까지 랜덤채팅 앱 등 온라인을 통한 성매매 집중단속에 나서고 있지만 온라인 그루밍 처벌과 잠입수사 허용 관련 법안이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라 이번 단속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수사와 처벌 등 사후 제도 개선뿐 아니라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전환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는 “텔레그램을 모니터링하다 보면 ‘온라인 그루밍 수법’을 공유하면서 ‘청소년의 성을 해방한다’는 식으로 정당화하는 가해자들을 자주 본다”며 “수사·처벌 기법이 보완되더라도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청소년들은 익명의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언제든 성범죄에 노출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