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회사 주주도 자회사 이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내용을 담고 있는 상법 개정안은 우리 기업들을 1년 365일 소송 리스크에 노출시킬 가능성이 크다. 이는 단순히 법률 대응 비용을 증가시키는 것뿐 아니라 기업인들의 자유로운 경영활동을 위축시키는 요인이 된다.
경영계가 기업규제 3법(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 중에서도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함께 다중대표소송제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다중대표소송제가 도입되면 글로벌 경쟁사가 국내 기업을 상대로 악의적인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커진다”며 “정부가 글로벌 시장에서 뛰는 한국 기업들의 발목에 커다란 납덩이를 다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22일 서울경제는 상법 개정안이 통과돼 다중대표소송제가 도입될 경우 삼성·현대차·SK·LG 등 4대 그룹의 핵심 계열사가 처할 수 있는 소송 리스크를 분석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상장회사인 모회사의 지분 0.01%(비상장 1%)를 보유하면 지분 50%를 초과해 가지고 있는 자회사 이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국내 시가총액 1위인 삼성전자의 6월 말 기준 발행주식 수는 총 67억9,266만9,250주로, 0.01%인 67만9,266주를 보유하면 자회사 이사를 상대로 다중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된다. 지난 21일 종가인 5만9,200원을 적용하면 0.01%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402억원이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5월 기준으로 삼성전자가 지분을 50% 초과해 보유하고 있는 자회사는 삼성디스플레이(84.8%), 삼성메디슨(68.5%), 삼성전자판매(100%), 삼성전자서비스(99.3%), 세메스(91.5%), 스테코(70%), 삼성전자로지텍(100%) 등 7곳이다. 402억원을 들여 삼성전자 지분 0.01%를 확보하면 7개 계열사 이사에 대한 소송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경제단체의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 시총 1위 기업도 400억원 정도만 있으면 다중대표소송을 걸 수 있다는 얘기”라며 “투기자본에 결코 큰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삼성그룹의 금융 계열사 ‘맏형’ 격인 삼성생명의 지분 0.01% 확보에 필요한 자금은 12억5,000만원가량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계열사는 삼성카드(71.9%), 삼성자산운용(100%), 삼성SRA자산운용(100%) 등 5곳에 달한다.
이 같은 방식을 재계 서열 2위인 현대기아차그룹에 적용하면 현대차 지분 0.01%를 사들이는 데 필요한 자금은 약 51억2,000만원에 불과하다. 현대차의 지분 50% 초과 자회사는 현대오트론(60%), 현대캐피탈(59.7%), 현대케피코(100%) 등 3곳이다. 이들 계열사에 직접 출자하지 않았더라도 모회사인 현대차 지분 0.01%만 보유하면 이사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서열 3위 SK그룹은 다중대표소송제 도입에 더욱 치명적이다. 핵심 계열사들이 자회사들에 대한 지분율이 높기 때문이다. 예컨대 SK텔레콤은 지분을 50% 초과해 보유한 자회사가 11번가(80.3%), SK브로드밴드(74.3%), SK커뮤니케이션즈(100%) 등 18곳에 이른다. 하지만 모회사인 SK텔레콤 지분 0.01%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19억4,000만원 수준에 그친다. SK에너지(100%), SK종합화학(100%), SK루브리컨츠(100%), SK인천석유화학(100%) 등 8개 자회사를 거느린 SK이노베이션의 지분 0.01%를 사들이는 데 필요한 자금은 14억7,000만원에 불과하다. LG전자는 16억4,000만원으로 5개 계열사의 이사를 상대로 소송 제기가 가능하다.
이런 탓에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다중대표소송제가 도입되면 상장사의 소송 리스크가 최대 3.9배 커질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서는 사안이 크든 작든 일단 소송이 한 번 걸리면 유무형의 비용이 적지 않게 소요된다”고 토로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도 “우리 기업들에 경영권 방어수단은 쥐어 주지 않고 헤지펀드 같은 투기자본의 공격 수단만 제공하는 입법”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