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낸 500억원대 손해배상청구 소송 1심에서 패소했다. 과거 흡연 피해자들이 낸 집단소송에서 대법원이 “흡연 이외의 다른 요인을 질병 원인에서 배제할 수 없다”고 판결한 것처럼 이번에도 법원은 담배와 폐암 등 질병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해외는 담배회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일부 판결이 나오고 있지만 국내는 흡연의 유해성에 대한 법원의 입장이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다만 공단 측이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힘에 따라 담배 제조사의 책임을 묻는 법적 다툼은 장기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2부(홍기찬 부장판사)는 20일 건보공단이 KT&G와 한국필립모리스·BAT코리아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소송이 제기된 지 6년여 만이다. 건보공단은 지난 2014년 4월 “흡연 때문에 추가로 부담한 보험 진료비를 물어내라”며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총 533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청구액은 소세포암 등 흡연과 인과성이 큰 3개의 암 환자들 가운데 20년 동안 하루 한 갑 이상 흡연했고 기간이 30년을 넘는 환자를 대상으로 건보공단이 2003∼2013년 진료비로 부담한 금액이다.
법원은 원고 패소 결정을 내리면서 질병을 야기하는 담배의 유해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흡연과 비특이성 질환인 질병 사이에 여러 연구결과 등이 시사하는 역학적 인과성이 인정되더라도 그 자체로 양자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만한 개연성이 증명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흡연자가 폐암 등에 걸렸을 때 병의 원인이 담배인지, 유전적 요인 등 다른 이유 때문인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는 얘기다. 재판부는 이어 “개개인의 생활습관과 유전, 주변 환경, 직업적 특성 등 흡연 이외에 다른 요인들에 의해 발병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법원은 또 건보공단이 보험가입자들에게 지급한 진료비를 이유로 담배회사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권한도 없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원고의 보험급여 비용 지출은 피고들의 위법행위 때문에 발생했다기보다 건강보험 가입에 따른 보험관계에 의해 지출된 것에 불과하다”며 “피고들의 행위와 보험급여 지출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담배와 질병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소송 주체는 건보공단이 아니라 피해를 본 환자 본인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법원의 이번 판단은 과거 대법원이 흡연 피해자들을 상대로 내린 판례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건보공단에 앞서 흡연 피해자와 가족 등 31명은 1999년 KT&G를 상대로 피해배상 소송을 냈지만 2007년 1월 1심, 2011년 2월 항소심, 2014년 4월 대법원 판결에서 모두 패소했다. 대법원은 중앙지법 결정처럼 흡연의 유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해외에서는 담배회사에 책임을 묻는 판결이 다수 나왔다. 미국의 경우 정부가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2006년 플로리다주 대법원이 1,450억달러 (약 150조원)의 천문학적인 금액의 손해배상을 판결했다. 이 판결은 미국 흡연자들의 개별 소송에 물꼬를 텄고 담배가 인체에 유해하다는 것을 법원이 인정한 기록적인 사례가 됐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법원이 담배회사들의 손을 잇따라 들어주면서 흡연으로 인한 피해는 아직 개인의 책임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