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리는 대한민국이 인공지능(AI) 선진국으로 가는 출정식이 될 것입니다.”
김재철(사진) 동원그룹 명예회장이 16일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본원에서 김남구 한국금융지주 회장과 김남정 동원그룹 부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KAIST에 대한 사재 500억 원 기부 약정식을 가졌다. ★본지 9월 23일자 1·2면 참조
김 명예회장의 기부금은 AI 분야 융복합 핵심 인재 양성과 연구 개발 지원에 사용된다. 기부는 개교 50주년을 맞는 내년 2월부터 매년 50억 원씩 이뤄지며 내년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양재동으로 이전하는 KAIST AI대학원에 쓰일 예정이다. KAIST는 AI대학원의 명칭을 ‘김재철AI대학원’으로 명명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역량을 갖춘 교수진을 단계적으로 확충, 오는 2030년까지 전임교원 수를 40명으로 늘리기로 했다.
김 명예회장은 이날 기증식에서 “AI 물결이 대항해 시대와 1·2·3차 산업혁명 이상으로 우리의 삶을 바꾸는 큰 변화를 이끌 것”이라며 “이 자리는 대한민국이 AI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출정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위대한 잠재력을 가진 우리 국민이 국력을 모아 경쟁에 나서면 AI 선진국이 될 수 있다”며 “과학 영재들과 우수한 교수진이 집결해 있는 KAIST가 AI 개발 속도를 촉진하는 ‘플래그십(flagship)’ 역할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우리나라가 AI 혁명으로 다시 한번 크게 도약해 기반을 튼튼히 하고 AI 시대를 주도한다면 세계사에 빛날 일이 될 것”이라며 “KAIST가 AI 인재 양성으로 AI 선진국의 길을 개척하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해줄 것을 바란다”고 당부했다.
신성철 KAIST 총장은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발전과 AI 강국을 만들기 위해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몸소 실천하신 김 명예회장께 경의를 표한다”며 “KAIST를 AI 인재 양성과 연구의 세계적 허브로 만들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앞서 KAIST AI대학원은 지난해 3월 고려대·성균관대와 함께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2019년도 AI대학원 지원 사업’ 대상에 선정된 후 같은 해 8월 문을 열었다. 현재 교수진은 구글·IBM·마이크로소프트 등의 AI 연구소 출신 전임 교수 13명과 겸임 교수 8명으로 구성됐으며 석사과정 79명, 석·박사통합과정 17명, 박사과정 42명이 재학 중이다.
지난해 4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AI 분야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 김 명예회장은 동원산업이 지난해 10월 한양대에 30억 원을 기부, 중소·중견기업을 지원하는 ‘한양 AI솔루션센터’를 설립하는 데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평소 “인공지능을 이해하지 못하면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동원의 미래 50년은 인공지능으로 승부 해야 한다”고 역설해왔다. 실제 동원그룹은 지난해 전 계열사에 로봇프로세스자동화(RPA) 프로젝트를 도입했으며 KT가 주도해 현대중공업·ETRI·한양대·LG전자·LG유플러스가 참여하고 있는 AI 기술 산학연 협의체인 AI원팀(AI One Team)에 올해 합류했다.
한편 KAIST에는 올 초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장을 지낸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이 동문 최고 금액인 100억 원을 기부한 데 이어 7월에는 이수영 KAIST 발전재단 이사장(광원산업 회장)이 676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출연, 이수영과학교육재단의 설립을 추진해 싱귤래리티(특이점)교수제도를 지원하기로 한 바 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김재철은 누구인가]
1935년 전남 강진에서 11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강진농고와 부산수산대학을 졸업한 뒤 1958년 참치잡이 원양어선 선원을 하며 10여년 간 바다를 누볐다. “당시 선사를 몇 번이나 찾아가 ‘1년 간 돈을 안 받고 죽어도 회사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원양어선을 탈 수 있었다”는 게 그의 회고다.
젊은 시절 망망대해를 떠돌 때 틈틈이 짬을 내 많은 책을 읽고 간결하고 생동감 있는 글을 썼다. 배에서 희생자도 적잖게 나오는 상황에서 당시 외국사람들한테 홀대 받고 자존심 상하는 일도 많아 남몰래 눈물 짓기도 했다. 이런 감상이 깔린 글을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는데 그의 글은 1965년부터 30여년간 초·중·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그는 1969년 일본에서 37만달러자리 원양어선을 “참치를 잡아 갚겠다”며 도입해 동원산업을 창업했고 그의 역발상과 결단력을 바탕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때 회사 자산보다 더 큰 규모의 선박 건조를 주문했고 1982년에는 공매로 나온 한신증권을 사 원양어선의 인센티브 체제를 도입해 오늘의 한국투자금융그룹으로 성장시켰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에는 세계 최대 참치캔 회사(스타키스트)를 사들였다.
한국무역협회장 시절인 지난 2000년 ‘지도를 거꾸로 보면 한국인의 미래가 보인다’를 저술한 것도 이런 경험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장기간 배를 타며 우주와 지구에 관해 상념에 젖을 때 지구의 지도를 거꾸로 보면 한반도가 유라시아 대륙을 발판 삼아 태평양으로 뻗어 있는 가능성의 땅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 책은 경제·경영 분야 베스트셀러로 등극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의 집무실 한쪽 벽면에는 위아래가 뒤바뀐 ‘거꾸로 세계지도’가 걸려 있다.
김 명예회장은 한국수산회 회장과 원양어업협회 회장은 물론 한국무역협회장에 취임한 1999년에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아 “이미 9세기에 수백척 선단을 끌고 중동까지 세력을 떨쳤다. 도자기 등 국제무역을 장악하고 정치·군사·종교·문화 모두 걸출한 업적을 남긴 영웅”이라고 기렸다. 여수엑스포 유치위원장을 맡아 대회 유치에 성공하기도 했다. 1991년 금탑산업훈장, 200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일본, 벨기에, 칠레, 페루, 뉴질랜드, 세네갈에서 공로훈장을 받기도 했다.
김 명예회장은 ‘기업인이라면 흑자경영을 통해 국가에 세금을 내고 고용창출로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1991년 당시 사상 최고액이었던 62억원의 증여세를 납부했고 1998년 IMF 외환위기 상황에서도 신입사원 공개 채용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회장 시절부터 인공지능(AI)를 강조하며 AI에 관한 책을 탐독하고 임직원에게 권하며 토론하기도 했다. 학구열도 남달라 1969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과 1978년 서울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을 마쳤고 1981년에 미국 하버드대 AMP과정을 밟았다
김 명예회장은 월급쟁이 생활을 할 때부터 고향 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했고, 동원산업 창립 10주년인 1979년 3억원의 사재를 출자해 ‘동원육영재단’을 설립했다. 재단 이사장으로서 지난 40년여년 간 8,000여명의 중고생과 대학생에 대한 장학사업, 대학 연구비와 학교 교육발전기금 지원 등 총 420억 원을 지원했다. 재단은 덕(德)·지(智)·체(體)의 조화를 통한 전인교육을 강조하는 ‘자양 라이프 아카데미’를 서울대·고려대·연세대·서강대·서울교육대·한국외대·숙명여대 등 12곳에서 하고 있다. ‘동원 책꾸러기 캠페인’도 벌이며 2007년부터 만 6세 이하 가정에 그림책을 140만권 이상 보내줬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