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있습니까.”
지난 8월 청문회를 앞두고 당시 고승범 금융위원장 후보자에게 국회의원들이 보낸 질문 중 하나다. 지난해부터 계속되는 ‘빚투(빚내서 투자)’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 열풍으로 가계부채는 연일 급증세다. 한국은행이 연내 기준금리를 올리고 미국에서도 테이퍼링(자산 매입 축소)을 시작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금융위 수장으로서 대책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후 청문회에서 드러난 고 위원장의 답변은 “상환 능력 중심의 대출 관행을 정립하는 등 최우선 순위를 두고 대응하겠다”였다.
약 3개월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금융 당국이 내세웠던 상환 능력 중심의 대출 관행 정립, 선제적 대응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브레이크 없이 증가하는 가계대출을 잡기 위해 급기야 은행들이 차주의 상환 능력에 상관없이 대출 판매를 중단하거나 대출금리를 올렸다. 이 과정에서 고신용자의 금리 상승폭이 저신용보다 크거나 은행권 금리가 상호금융권보다 높아지는 등 ‘금리 왜곡 현상’도 발생했다. 그로 인한 피해는 대출받기도 힘든데 높은 이자 부담까지 지게 된 국민들에게 돌아갔다.
실제로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의 신규 취급액 기준 신용대출 가산금리는 1월 대비 9월 말 0.01~0.34%포인트 뛰었다. 같은 기간 가감 조정 금리(우대 금리)는 KB국민(0.1%포인트)·하나은행(0.91%포인트)을 제외하고 모두 감소했다. 우리은행과 NH농협은행은 0.18%포인트, 0.22%포인트로 감소 폭이 컸다. 대출금리는 준거 금리에 가산금리를 더하고 가감 조정 금리를 뺀 값이다. 가감 조정 금리가 줄면 차주들이 체감하는 금리 인상 폭은 커지게 된다. 이마저도 취약 차주일수록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못해 더 높은 이자를 내고 대부업체를 비롯한 불법 사금융 업체까지 몰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차주들의 비판이 커지자 금융 당국이 뒤늦게 은행의 대출금리 산정 체계가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운영되는지 살펴보겠다고 나섰다. 올 1월 금융 비용을 절감하겠다며 내세운 금리 인하 요구권 활성화도 다시 내걸었다. 은행들 역시 금융 당국의 개입에 따라 축소했던 우대금리를 다시 올리는 등 조치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 일부 대출 판매를 중단해온 농협은행도 무주택자에 한정한 주택담보대출 등 최소한 대출 판매를 재개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이를 두고 시장에서는 역부족이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은행으로서는 금융 당국이 제시한 5~6%대의 가계대출 증가 목표치를 지키기 위해 대출 중단 및 금리 인상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가계대출의 전체 규모를 잡는 데 급급해 군사작전하듯 정책을 밀어붙이는 한 대출 중단, 우대금리 축소를 통한 금리 인상 효과 등의 문제는 언제든 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다. 당장 오는 25일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추가로 인상하는 게 유력한 데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또한 테이퍼링 속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는 신호를 내비친 점도 부담이다.
가계부채를 둘러싼 규제 방향을 두고 고민이 필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에 당국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앞서 2003년 카드 사태 때 대출 중단, 일시 상환 등의 급격한 대책이 몰고온 후폭풍을 겪은 바 있다. 당시 금융 당국이 카드 발급을 제한하고 카드론을 축소하면서 카드사들이 일시에 대출을 회수했다. 그 결과 신용 불량자가 급증하고 가계 소비는 급감했다. 현재의 가계부채도 얼마든지 카드 사태와 같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과거 경험상 금융 불균형 해소는 경제 위기를 통해 비자발적·급진적으로 진행했고 정책 대응을 통해 해결한 경험이 부족하다”며 “가계부채 대응책이 급격한 디레버리징(부채 감축)을 촉발할 경우 신용 리스크 및 경기 침체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수요자’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작업도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부터 고승범 금융위원장까지 모두 실수요자가 대출 정책으로 피해를 보지 않게 하라고 말하지만 어디까지 실수요자로 볼지 불분명하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지금 너무 급하게 대출 규제를 펼치다보니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며 “가계대출의 총량을 줄이는 게 의미가 없지는 않으나 장기적으로는 부채의 건전성을 따지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