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찾은 LS일렉트릭 부산사업장의 초고압생산동에서는 수십 명의 직원들이 모여 ‘동각선(순도 99.999% 이상 순동)’을 마는 권선(코일)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동각선 가운데 구멍에 자기 회로를 넣는 철심 가공과 및 적층 공정을 거친 뒤 이를 건조로에 넣어 80시간 이상 바싹 말리면 컨테이너를 두세 개 합쳐놓은 거대한 크기의 초고압직류송전(HVDC) 변압기가 탄생한다. 주요 공정이 손으로 이뤄지는데다 주문도 워낙 밀려 있어 포드·한전 등 국내외 주요 고객사들이 이 변압기를 납품받기까지 걸리는 리드타임(제품 주문 후 납품까지 걸리는 시간)은 통상 16개월에 이른다.
안상훈 LS일렉트릭 생산기획팀 매니저는 “권선(코일) 작업에서는 작은 이물질이라도 들어가면 폭발할 수 있기 때문에 오염 없는 생산 환경 구축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크레인에서 철가루가 떨어지는 것도 막을 수 있는 자체 청정 시스템이 있다”고 설명했다.
HVDC는 발전소에서 나오는 고압의 교류 전력을 직류로 변환한 뒤 전기를 받는 지역에 교류로 공급해주는 전력전송기술이다. 기존 방식보다 송전 거리에 따른 손실이 적기 때문에 장거리 송전에 유리하다. 이때 변압기는 발전소에서 갓 만들어진 전력이 먼 곳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높은 전압으로 변환해주는 역할을 한다. 비유하자면 송전망 내에서 피가 돌게 하는 ‘심장’ 역할을 하는 셈이다.
LS일렉트릭은 빠르게 증가하는 HVDC 변압기 주문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부산 공장의 경우 2025년 10월까지 생산할 수 있는 물량 주문이 이미 채워졌을 정도다. 2020년 전까지 전체 5건에 불과했던 초고압 변압기 북미 수출 실적도 지난해와 올해 33건까지 급증했다. 수주액은 2000억 원 정도로 크지는 않지만 북미 시장 개척을 일궈낸 만큼 고무적이라고 보고 있다.
안 매니저는 “돈을 더 줄 테니 빨리 만들어 달라는 프리미엄이 붙을 정도”라며 “빠른 생산을 위해 건조로와 시험실 생산능력(CAPA)을 두 배로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주문량 증가는 대용량 장거리 송전 수요와 노후 변압기 교체 주기가 맞물린 결과다. 현재 미국 본토 변압기의 절반 이상은 1970년 이전에 설치됐는데 대형 변압기 평균 수명이 40년 정도라는 점을 고려하면 교체 수요가 발생할 시기다. 미국 인프라투자 및 일자리법(IIJA)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의 영향으로 노후 전력망 교체와 성능 개발을 위한 대규모 정책 자금도 투입되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글로벌마켓인사이트에 따르면 북미 고전압 변압기 시장 규모는 2022년 33억 달러에서 2032년 69억 달러(8조 9479억 원)로 연평균 6.7%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상황은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초고압 변전기 시장에 진출한 LS일렉트릭에겐 더할 것 없는 호재다. 지멘스와 ABB 등 글로벌 주요 경쟁사 물량이 꽉 찬 틈을 타 후발 주자인 LS일렉트릭에게도 고객사를 늘릴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LS일렉트릭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지난해 말 전원 엔지니어로 구성된 북미사업활성화 태스크포스(TF)를 자체적으로 꾸리는 등 적극적으로 사업 확장에 임했다.
천성진 북미사업활성화TF 매니저는 “주요 경쟁사가 3년 이상 물량이 채워진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생산능력 여유가 있었던 LS일렉트릭으로 수주 문의가 많이 왔다”며 “이번 달은 물론 내년 초에도 고객 방문이 예정돼 있을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고 말했다.
향후 목표는 물꼬를 트기 시작한 미국 시장에서 신재생에너지 발전단지 수주를 늘리는 것이다. 이미 주요 사업자로서 위치를 확립한 중저압 배전 솔루션과 초고압 제품과의 판매 시너지도 노린다. LS일렉트릭 관계자는 “글로벌 메이커에 비해 시장 참여가 늦었지만 핵심 기술 역량과 신뢰성 확보를 위해 2009년부터 2800억 원을 과감히 투자해 최신 시험 장비와 청정 생산라인을 구축했다”며 “저압·고압부터 초고압까지 전체 전력솔루션을 모두 공급할 수 있는 풀 라인업을 확보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