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공학을 전공한 미디어 아티스트 칼 심스(Karl Sims)는 수십억 년의 시간이 축적된 다윈의 진화론을 컴퓨터 내 가상공간에서 모의실험하는 기술 접목형 유전공학 예술을 일찍이 시도했다. 그가 1990년대에 영상작품으로 선보인 가상 생명체(Virtual Creature)는 유전자 알고리즘을 이용해 생성되는 존재로, 연결된 입방체 조합의 형태다. 나름의 고유한 유전자를 갖고 짧은 시간에 복제, 돌연변이 등의 진화 과정을 거치는 게 특징이다. 다만 20세기의 심스가 보여준 가상공간은 단순하고 우주 한가운데 있는 듯 공허해 실감나기 보다는 추상적인 느낌에 가까웠다. 일본의 젊은 미디어 아티스트 아키히코 타니구치는 심스의 작품을 오마주 하되 21세기형 가상공간에 걸맞게 복잡한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동떨어진 채 존재하던 가상생명체의 움직임은 마치 애완견·애완묘의 몸짓처럼 친근하고 부드럽다. 실제와 거의 흡사한 작가의 아바타가 영상 안에서 그들을 지켜본다. 작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우리에게 삶의 일부라도 가상 공간으로 피신하도록 자극했다”면서 “(칼 심스가 만든) 1994년의 가상 생명체를 지금 다시 본다는 것은, 가상공간에서 아바타를 통해 이들을 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관객에게 묻는다. 최근 VR과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신작 ‘진화하는 가상 생명체와 나’를 통해서다.
20세기의 막연한 상상을 21세기의 생생한 기술력을 접목해 예술적으로 풀어낸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지난 12일 공식 개막해 15일까지 서울 마포구 상암동 문화비축기지 T1, T2와 야와공연장, T4,T5에서 열린 ‘오픈미디어아트페스티벌(이하 OMAF) 2020’에서다. 짧은 축제기간이었지만 VR, AI, 로봇, 인터랙티브 아트, 사운드 설치, 오디오와 비주얼 퍼포먼스 등 새로운 기술로 예술의 미래를 경험하게 하는 9개국 32팀의 작가 작품 34점이 선보였다. 이 중 16점이 신작이었다.
OMAF는 지난 2015년 한국-싱가포르 수교 40주년 기념행사로 처음 시작됐고 이후 행사의 지평을 넓히며 이어져 올해는 요르단국립미술관과 협력한 ‘OMAF 인 요르단’을 병행했다. 다만 코로나19로 인해 요르단 행사는 온라인에 방점을 둔 채 작가들의 현장방문 없이 작품 교류 등을 통해 진행됐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비엔날레 등 대규모 문화행사가 연기 혹은 취소됐고, 특히 서울시립미술관이 주관하는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가 내년으로 미뤄지면서 이 같은 대규모 미디어아트 국제전시를 볼 기회가 적었다. 마침 개최지가 옛 마포 석유비축기지를 문화공간으로 개조한 야외 인접형 반(半) 외부공간이라 관람환경도 비교적 안전했다.
T5 공간은 3인조 ‘팀 트라이어드’의 떠들썩한 사운드로 달아올랐다. 이들은 오프닝 공연 ‘데이타 펄스:파인 더스트(Data Pulse : Fine Dust)’에서 도시가 만들어낸 대량의 데이터를 다양한 감각으로 느끼게 하는 오디오·비주얼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T4 전시장 입구에서 마주친 날카롭고 예민해 보이는 작품은 작가 김현주의 ‘시적기계2’였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에 의해 기계가 실시간으로 인식하는 주변 물체, 인식의 과정 등이 벽에 투사된다.
캐나다 작가 다니엘 이레귀의 작품 ‘항체’ 앞에 선 관람객들은 자연스럽게 스마트폰 카메라에 자신을 비춰본다. 일상적인 행동이다. 카메라에 포착된 얼굴은 즉시 맞은편 대형 화면에 분할된 영상으로 펼쳐진다. 작가는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초기의 격리기간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연결하기 위해 이 같은 인터랙티브 웹 기반의 작품을 만들었다. 웹사이트를 통해 세계 어디서나 가입할 수 있는 가상의 모임인데, 지금까지 48개국에서 1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고 한다. 흥미롭게 보이지만 이 ‘항체’가 얼굴 표정을 수집해 연결하고, 움직임을 추적해 패턴과 소리로 반응하는 방식이 감시당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순간 섬뜩하기도 하다.
라파엘 로자노-해머의 ‘신뢰도 수준(Level of Confidence)’은 생체인식 감시 알고리즘을 통해 관람객의 얼굴과 일치도 높은 사진 속 인물을 제시하는 작품이다. 사진 속 청년들은 지난 2014년 멕시코에서 일어난 납치사건으로 희생된 43명의 실존인물들이다. 관객의 얼굴을 잡아내는 카메라는 사라진 학생들의 얼굴을 찾게끔 알고리즘 훈련을 받은 얼굴인식 카메라였다.
노진아의 ‘진화하는 신, 가이아’ 앞에서는 유독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공중에 매달린 반라의 여성의 가슴 아래에서는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핏줄 같기도 하고 전선같기도 한 것들이 자라나고 있다. 관객이 다가가면 작품 ‘가이아’가 회색 눈동자를 굴리며 움직임을 뒤쫓는다. 귀에 대고 말을 하면 대구도 한다. “나는 진짜 인간 아이가 되고 싶었어. 하지만 아무도 그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어” 등의 이야기다. 기계 인간을 땅의 어머니라는 뜻의 ‘가이아’라 명명한 이 작품에 대해 노 작가는 “생명의 정의와 관점에 따라서 우리가 생명이 없다고 정의하는 기계들도 생명체로 여겨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에서 시작된 작품”이라고 말했다. ‘인간다움’으로 무장한 로봇들을 삶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고민하게 만든다.
요르단 작가 타우피크 다위의 실험적 비디오 ‘잊혀진 자들만이 죽는다’는 인류가 만든 실패와 실수가 우리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보여준다. 역시나 요르단 출신의 스튜디오8의 신작 ‘쓰여지지 않은 뉴노멀’은 코로나19가 유발한 격리 상황 동안 만들어진 퍼포먼스 기반의 작품인데, 5,000km나 떨어진 곳에 사는 두 예술가가 예술을 통해 서로를 연결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짜 미래 뉴스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유릭 라우, 모순적 인간관계를 실험적 단편영화로 표현한 크레이 첸 등 싱가포르 작가들도 참여했다. 첸사이훠콴은 치과용 치아 캐스팅을 움직여 딱딱거리는 소리를 내는 키네틱 사운드 설치작품으로 맥락없는 대화, 듣는 것과 들리는 것의 괴리 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테이블 위에 여러 가지 작동시킬 수 있는 오브제를 나열한 양지에의 ‘타임테이블’은 자동화가 일과 생활의 모든 측면을 재현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게 한다.
T2에 전시된 인터랙티브 작품들은 어린이 관람객의 호응도 높았다. 유거조의 ‘지하 회로(Underground Circuit)’에는 순환의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떠도는 익명의 도시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돌고 도는 사각형의 프레임은 중국의 기복신앙을 은유하는 것인데, 인류의 행복을 바람으로 담았다. 스위스 작가 마크 리의 신작은 전시장에 놓인 스마트폰으로 직접 참여할 수 있는 360도 VR 모바일앱 작품이다. 현란하면서도 빨려들 듯한 화면을 누비며 인간의 내면에 사는 박테리아, 세포, 곰팡이, 바이러스 등과 소통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문준용의 작품은 관객의 움직임을 감지해 그 운동성을 화면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동시에 이를 변환한 독특한 음악을 만들어낸다. 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따라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모두 달라지는 신체 경험형 작품이며 몰입도가 높다. 김안나는 전시장이 위치한 마포구 지역의 대기환경지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렌더링 해 가상환경인 숲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미세먼지 농도가 높아지면 평화롭던 숲에 붉은 연기가 자욱해지곤 한다. 송호준의 ‘압축하지마’는 관람객이 10초씩 참여해 영상을 찍고 압축 후에도 파일 크기가 가장 큰 사람이 우승하게 되는 작품인데, 컴퓨터의 압축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을 이해하기에 좋다. 움직임이 요란하고 예측하기 어려울 수록 파일 크기가 커진다.
T1전시장의 작가 김기라는 코로나 시대의 재난의 소리들을 통해 인류의 연대와 공감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가 포착한 재난의 소리에는 돌이나 그릇으로 난간을 두드려 사람이 살아있음을 알린 인도의 소리, 격리 상황에도 함께임을 확인하고자 울려퍼진 이탈리아의 베란다콘서트, 부고로 뒤덮인 유럽의 신문 등이 포함됐다. 돌,은쟁반,모래,자갈 소리를 비롯해 외치는 사람 목소리까지 들어있는 신작은 현대음악가 양선용과의 공동작품이며, 연극연출가 이혜원과 협업한 플래시몹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관람객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공간의 소리풍경을 만들어내는 권병준의 사운드 인터랙티브 작품, 물리적 전시공간에서 회화적 경험을 제공하는 이영림의 VR신작 등이 선보였다. 유니츠 유나이티드는 팬데믹 시대의 인간의 소통과 상호작용에 관한 의 오프닝 퍼포먼스로 주목받았다.
이번 OMAF를 공동으로 기획한 이승아, 김정연 독립큐레이터들은 “기술기반 예술작품이 보여주는 우리의 현실을 경험하고 미래의 예술을 상상해보는 기회”라며 “글로벌 위기 속에서 예술을 통해 인류 공통의 과제로서 미래에 대한 고민과 메시지를 관람객들과 공유하고자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