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애처럼 뛰어 보세요”라는 주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할 것 같은지 상상해보세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우스꽝스럽게 두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달리는 모습을 흉내 낼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지나치게 여성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추가적인 노력이 수반될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2014년 P&G 제작 광고에서 남녀 성인들은 실제로 이런 주문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팔다리를 팔랑팔랑 흔들면서 미디어가 만들어낸 여성의 모습을 재연했죠. 하지만 실제 소녀(girl)들이 “여자애처럼 달리고, 싸워보라”는 같은 주문을 받자 이들은 전속력으로 달렸고, 강한 펀치를 날렸고, 온몸으로 공을 던졌습니다. 이 광고는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흔히 비하의 맥락에서 사용되는 ‘여자처럼 뛴다(Run like a girl)’는 표현은 스포츠에서 여성의 몸(female body)이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상징하는 중요한 표현이 됐습니다. 신체에 부과된 편견이 스포츠라는 분야의 진입과 실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많은 연구결과를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게임 속에서는 어떨까요? 게임은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것 같은 사이버 가상공간처럼 느껴집니다. 이에 성이나 인종, 나이, 계층 등 각종 현실의 차이와 차별로부터 자유로운 대안적 공간으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죠. 게임 속에서도 차별과 혐오는 지속적으로 문제가 됐습니다. 게임 속에도 ‘몸’은 있었습니다. 게임은 키보드를 누르고, 마우스를 쥐는 물리적인 상호작용을 수반합니다. 게이머들은 몸이라는 실체를 통해 게임이라는 가상공간에 접속하죠. 게임 속에서 총을 격발해 상대방을 맞추기 위해서는 실제로 손가락을 움직여 마우스를 클릭해야 합니다.
이런 부분을 조명한 논문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저자 김지윤)’가 화제입니다. 한국언론정보학회(학회장 손병우) 10월호에 게재된 논문으로,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우수학위논문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FPS(1인칭 슈팅게임) 게임인 ‘오버워치(Overwatch)’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 10명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고 이들이 게임 내에서 직면한 딜레마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연구결과 많은 게임이 남성을 고객으로 타깃팅하는 상황에서 여성 게이머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검열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음성 채팅으로 성별을 알 수 있는 오버워치 같은 게임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죠. 게임이 남성들이 잘하는, 또한 남성들을 위한 영역으로 취급되는 상황 속에서 게임 자체에 진입하는 데도 많은 제약을 받습니다.
게임 커뮤니티 상에는 게임, 특히 FPS 게임에서 남녀 실력 차가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FPS 게임은 다양한 게임 장르 중에서도 조작이 상대적으로 어렵다고 여겨지고, 경쟁적인 분위기가 강합니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피지컬(신체 능력)’이 부족하다”는 편견이 일반 스포츠는 물론이고 게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죠. 이에 대해 인터뷰에 응한 여성 게이머들은 성별 실력 차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생물학적 차이에서 기인한다기보다는 주변의 반응을 통해 스스로 한계를 내재화한 데서 왔다고 증언했습니다.
오버워치로 FPS 장르를 처음 접한 인터뷰이 G씨는 FPS 게임을 시작할 당시 자연스럽게 일반적으로 여성 유저들이 많이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캐릭터를 골랐다고 했습니다. 조작의 정교함이나 숙련도가 덜 필요한 캐릭터들이었죠. G씨는 남녀 실력차이는 이 같은 사회적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고 전하며 “게임 실력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고 패배를 싫어하는 건 모두 같은데, 통념에 묶여있을 뿐 그것을 극복하면 남자들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G씨는 ‘랭커’라고 불리는 오버워치 상위 500위 안에 들었습니다.
역할군을 고를 때도 “여성은 힐러를 많이 한다”는 편견 속에 있는 동시에 “여성은 힐러를 해야 한다”는 이중적인 압력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인터뷰이 H씨는 “남성 유저들이 딜러를 할 때는 못했을 때 ‘이 판이 밀린 거다’라는 말을 듣지만, 여성 유저가 못하면 ‘여자가 무슨 딜러야’라는 비난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H씨는 오버워치 플레이 시간이 2,000시간이 넘는 ‘그랜드마스터(상위 1%)’ 티어로, 반발심에 딜러 계정을 만들어 ‘다이아몬드(상위 5~15%)’ 티어까지 올라가기도 했으나 그 과정에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욕을 먹자 체념하고 ‘힐러 모스트(주력)’ 플레이어가 됐습니다.
B씨는 여자는 ‘메르시(힐러 캐릭터)’를 하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일부러 메르시를 플레이하지 않았지만, 여성만이 여성 캐릭터와 관련된 비하 발언을 듣는 상황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죠. B씨는 “‘남성인 친구들이 메르시를 플레이해도 ‘남자 메르시’ ‘X지 메르시’라는 말을 안 듣는데, 여자가 하면 ‘X르시(여성 메르시 유저를 지칭하는 멸칭)’라는 소리를 들으니까… 그들이 잘못된 건데도 메르시를 안 했다”고 전했습니다.
재미있게도 한국에서 여성 게이머를 가시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도 바로 이 오버워치라는 게임에서였습니다. 오버워치에는 한국인 프로게이머 캐릭터, ‘디바(D.va)’ 송하나가 등장합니다. 스타크래프트, 리그오브레전드 등 각종 프로 e스포츠 리그에서 활약해온 한국 프로게이머에 대한 오마주로서 등장한 캐릭터였죠. 이 캐릭터는 현실 e스포츠 프로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여성이라는 점에서 여성 게이머의 희망과 같은 상징으로 떠올랐죠. 실제로 미래의 송하나가 태어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노력하자는 취지에서 여성 게이머들의 모임인 ‘전국디바협회(현 페이머즈)’가 출범하기도 했습니다.
오버워치 메인 디렉터인 제프 카플란은 전국디바협회 활동에 찬사를 보내며 한 게임 매체의 행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Never accept the world as it appears to be. Dare to see it for what it could be.(세상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뭐가 될 수 있을지’를 보세요)”
게임이 특정 성, 계급, 인종의 사람들에게만 자유롭다면 그것을 진정한 자유라고 부를 수는 없겠죠. 보다 많은 사람들이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더 다양한 연구와 발견, 변화가 이뤄질 필요가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