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거 우즈(미국)가 인정한 특급 유망주, 드라이버로 280야드를 펑펑 날리는 장타 소녀…. 너무 이른 스포트라이트는 길게 보면 독이라는 얘기가 많지만 장하나(28)는 예외다. 열두 살에 한국여자오픈 최연소 컷 통과 기록을 쓰는가 하면 우즈 방한 행사에 한국 대표 꿈나무로 초대받아 골프 황제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그는 여전히 국내 최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스무 살이던 2012년에 280야드 장타를 앞세워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첫 우승에 성공한 장하나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시절이던 2016·2017년을 포함해 올해까지 9년째 매년 1승 이상씩을 쌓아 왔다. 국내 통산 13승째인 올해 우승은 지난달 1일 SK네트웍스·서울경제 레이디스 클래식에서 해냈다. 화끈한 골프로 주목받던 시절을 지나 꾸준함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는 장하나를 최근 서울 종로구 서울경제 본사에서 만났다.
공동 2위가 4명일 정도의 접전을 2타 차 우승으로 정리한 장하나는 “연습 라운드부터 느낌이 좋았다. 11월의 첫날에 한 우승이라 의미가 크다”며 “11월에 우승하려고 10월에 그렇게 힘들었나 싶다”고 돌아봤다. 어깨와 등에 담이 심해져 직전 대회를 기권했던 장하나는 아버지의 건강 악화에다 가까웠던 큰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등 10월에 유독 힘든 일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서울경제 대회를 앞두고 주변에 “무조건 우승하고 만다”고 어느 때보다 의욕을 보였다. 약속대로 챔피언 퍼트를 넣은 장하나는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날려버리듯 ‘홈런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장하나는 바로 다음 대회에도 우승 경쟁에 나서는 등 막판 스퍼트 끝에 시즌 상금 3위, 평균 타수 2위의 풍성한 수확을 거뒀다. 하루 400~500개의 연습볼을 치며 스윙 교정에 매달린 결과다. 시즌 중 스윙 교정은 “정말 도박을 걸었던 것”이라고 돌아볼 만큼 부담이 큰 승부수였다. 새 스윙 코치의 지도 아래 혹독하게 훈련한 끝에 특유의 몸통 스윙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장하나의 KLPGA 투어 통산 상금은 약 47억5,300만 원으로 1위다. ‘그 돈으로 뭐 했나’ ‘재테크는 어떻게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지 않느냐고 묻자 장하나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초등학생 때부터 어른들과 공 칠 기회가 잦았는데 ‘나중에 돈 많이 벌어도 재테크에 너무 관심 두지 마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재테크는 잘 모른다지만, 가치 있게 돈 쓰는 법은 잘 아는 것 같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장하나가 지금까지 기부한 돈은 3억 원이 넘는다. 2013년 상금왕·대상(MVP) 포인트 1위 등 다관왕에 올라 장애인 골프 선수들과의 행사에 참여했는데, 당시 느낀 게 많아 그때부터 특히 장애 아동 돕기에 앞장서고 있다. 고깃집을 운영하던 아버지 장창호(68)씨가 보육원 아이들을 1주일에 두 번씩 식당으로 초대해 밥을 먹이고 생일 잔치를 열어주곤 했는데 그 영향도 컸다. 장하나는 “어릴 적부터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 베풀면 그만큼 좋은 일이 생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서울경제 대회 우승도 아동 복지 시설에 공기청정기를 기부한 직후 선물처럼 찾아왔다.
우즈와 관련한 일화도 하나 소개했다. 2004년 방한 행사 때 네 잎 클로버로 네임 태그를 장식해서 우즈에게 직접 선물했다는 것이다. 당시 장하나는 콜린 몽고메리(스코틀랜드)의 원 포인트 레슨을 받고 있었는데 예사롭지 않은 샷이 옆 타석 우즈의 마음을 뺏어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다. 장하나는 “당시 우즈는 제게 연예인보다도 더 신기한 대상이었으니 비현실적인 경험이었다”면서 “요즘도 우즈가 없는 골프계는 좀 허전한 면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신동으로 출발해 여왕으로 잘 자란 장하나지만 슬럼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KLPGA 투어 2년 차 전반기까지 드라이버 입스(샷 하기 전 불안 증세)에 시달렸다. “고2 때 프로 대회에 나가 톱 3에 두 번 들었으니 프로 데뷔하면 적수가 없을 거라는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갔더니 공이 안 맞고 그러니까 조바심에 입스까지 왔던 거죠.” 전반 9홀에만 아웃 오브 바운스(OB)를 5~6방 낼 정도였다. 해결책은 정면 돌파였다. 좁고 압박이 심한 홀에서 일부러 더 세게 쳤다. “‘네가 죽나, 내가 죽나’ 식으로 강하게 나갔더니 어느 순간 두려움이 사라지더라고요.”
어느덧 ‘고참급’이 된 장하나는 요즘 부쩍 학부모들로부터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때마다 장하나는 이렇게 얘기한다. “아이들이 쇼트 게임장에서 자유롭게 놀고 있으면 그냥 놔둬 보라고 말씀드려요. 미국에 가 보면 7번 아이언으로 그린 주변에서 플롭 샷하고, 정말 난리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이것저것 스스로 실험하다 보면 어떻게 해야 공이 뜨거나 낮게 가는지 깨우치게 돼요.” 장하나도 “주니어 때부터 도전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에” 낮게 깔아 치는 펀치 샷이나 의도된 슬라이스 등 이른바 ‘기술 샷’에 가장 능한 여자 선수 중 한 명이 됐다. “저는 항상 하는 말이 ‘아빠, 왜 꼭 똑바르게만 쳐야 돼?’였어요. 요리에서 손맛이 중요하듯 골프도 손 감각에 의한 부분이 크다고 봐요. 자기만의 감각, 개성 있는 레시피는 결국 처음 배울 때의 경험에서 얻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서른인 장하나는 “30대에는 ‘편안한 골퍼’이고 싶다”고 했다. “아빠도, 팬들도 조마조마하지 않고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그런 골프를 하고 싶어요.” 아직 우승 못 한 2개 메이저 대회를 정복하는 것도 스스로 낸 숙제다. 무르익은 30대의 골프를 위해 장하나는 며칠 전부터 밀가루 음식을 아예 끊었다. 3~4년 전부터 시즌 중에 탄산음료는 입에도 대지 않는 그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우승 인터뷰를 하면서 ‘앞으로는 다른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라고 은퇴 선언을 하는 게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시나리오예요. 그러려면 더 철저해져야 해요. 일단 내년에는 10년 연속 우승으로 찾아뵈면 좋겠습니다.”